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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쟁적이라 비경쟁적이다

2023-01-07

10월 한라산 52km 대회에서 장경인대를 다친 뒤 가벼운 2, 3km 달리기도 제대로 못한 지 3개월이 지났다. 고작 해야 1주일이면 나을 것 같았던 다리는 심하면 무릎이 아팠고 충분히 쉬었다 싶으면 골반, 엉치뼈 주변, 고관절, 햄스트링에서 자꾸만 통증이 올라왔다. 쉬었다가 뛰어보고 재발하는 통증을 반복한 지 3개월 정도, 도통 끝날 줄 모르는 통증은 나를 혼란함에 빠트렸고 나의 몸상태에 대해 불확신만 키워갔다. 수술? 물리치료? 기간은? 마라톤이든 트레일러닝이든 다시 복귀할 수는 있나? 다치자마자 갔으면 쉬웠을 것을 내가 내 부상을 더 키운건 아닐까? 좌절감에 빠져 더기의 추천으로 러너 전문 병원을 가기로 마음 먹었다.

내가 간 병원은 남정형외과 - '달리기와 철인삼종경기를 즐기며 그와 관련된 부상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정형외과 클리닉'. 따로 예약을 잡고 가야했고 러너임을 확인한 뒤에는 별도의 질문지와 인바디 등을 측정했다. 한쪽에는 트레드밀과 함께 자세를 분석하는 카메라 - 엑스바디가 있었는데 블라인드로 공간을 분리한 뒤 의사선생님과 앞 환자분이 달리기 자세를 분석하는 소리가 들렸다. 병원 곳곳에 붙어있는 수술 사진들에 지레 겁을 먹고, 나도 수술일까? 혹은 여러 차례 주사 치료를 병행해야 할까? 치료 기간은? 햄스트링과 고관절을 쓰지 말아야 하는건가? 그럼 아쉬탕가와 수영은? 온갖 걱정에 빠져있는 차에 내 순서가 됐고 알 수 없는 공포심에 휩싸인채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자 달리기 자세부터 한번 볼까요"

치료를 논하기 이전에 자세부터 바로잡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선생님의 이야기와 함께 트레드밀에 올랐다. 내 자세를 분석하는 화면에 뜨는 여러 숫자들. 그 숫자 중 유독 숫자 하나가 이상하다. 어떤 숫자가 좌측이고 어떤 숫자가 우측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대칭적이어야 할 것 같은 좌우 숫자가 하나는 0을 반복하고 하나는 5를 반복한다. 나는 분명 잘 뛰고 있는데…

"자, 내려오셔서 좌우로 런지 동작 한번 해보시죠. 그리고 한쪽 다리를 들고 앞 뒤로 왔다갔다 해보세요. 흠… 너무 이상하네. 신체 밸런스는 좋은데요? 근데 달리기는 거의 절뚝이듯 오른쪽 다리로만 하고 있어요. 이런 경우는 거의 없는데 말이에요. 요가를 하셔서 그런지 밸런스는 아주 좋아요. 근데 달리기만 하면 오른쪽 다리로만 뛰니까, 자꾸 오른쪽 다리에 무리가 오는거에요. 사실 지금 환자분은 치료할 필요도 없어요. 굳이 필요하면 그냥 집 근처 아무데서나 물리치료 받으셔도 돼요. 환자분은 왼쪽 다리와 오른쪽 다리를 균형감 있게 쓸 수 있도록 자세를 교정하셔야 해요. 내일 당장 한시간도 뛰어도 괜찮아요. 메트로놈이 도움이 될겁니다. 메트로놈을 켜두고 오른발, 왼발을 메트로놈에 맞춰서 내딛는 연습을 하세요."

진료를 받은 당일 저녁 메트로놈에 맞추어 8km를 무리없이 기분 좋게 뛰었다. 믿을 수 없었다. 당장 병원에 가기 며칠 전만 해도 3km를 달리고 와서 통증에 시달렸는데. 알 수 없는 몸상태가 겁이 나 수술까지 생각했는데 말이지.

병원에 러너로 등록하면 받아보는 질문지에는 이런 질문이 있다. "당신은 경쟁적인가요, 비경쟁적인가요?" 주저없이 <비경쟁적>에 체크했던 나는 항상 왼발보다 앞서 앞으로 나가던 오른발을 떠올린다. 나는 비경쟁적인 사람인가? 남들보다 ‘부족한’ 고관절에 언제나 억울해하던 나의 마음을 떠올린다. 나는 비경쟁적인 사람인가? 학창 시절 어떤 과목이든 뒤쳐지기 싫어 운동이든 공부든 예체능이든 나를 몰아부치고 나 자신과, 나의 상대들과 전투를 벌인 나를 생각한다. 나는 비경쟁적인 사람인가? 첫번째 트레일 러닝 대회에서 일면식 없는 사람들과 나 혼자만의 경쟁을 벌이다 다섯군데의 쥐가 나 산길 한가운데 주저 앉은 나를 떠올린다. 나는 비경쟁적인 사람인가?

아마도 경쟁심으로부터 잠식되는 나를 피해 비경쟁적인 곳으로 도망치려 애쓰는 경쟁적인 사람일 것이다.

"승훈님이 자꾸 고관절에 억울함을 느껴서 되려 승훈님의 고관절이 참 억울했을지도 몰라요. 이렇게 애쓰고 노력하는데 자꾸 억울하다, 억울하다 하니까 당황했을지도 몰라요. 기특하고 대견하기만 한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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